안시성/ 전투 스펙타클로는 한국 영화 최정점, '시티 오브 헤븐' 정도? 아쉽지만 나름 만족
- 리뷰 이야기 Reviews/영화 Movies
- 2018. 9. 24. 23:26
추석 맞이 영화 관람은 안시성으로 정했습니다. 평이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함께 개봉한 영화 중에 평이 좋은 영화가 없어서... 반신반의, 게다가 도시적인 이미지의 조인성이 장군 역할을 잘 소화할지 걱정되어서 영화관으로 가는 발걸음에 주저함이 가득했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만족했습니다.
CG가 조금 튀기는 했지만 당나라의 대규모 물량을 잘 표현한 전투 장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공성전 영화의 클리세를 많이 가져다 썼지만, 어설프지 않아 지루함도 없었죠. 걱정했던 조인성의 연기도 저는 괜찮았습니다.
조인성이 출연한 CF가 생각난다는 분이 많았는데 저는 집에 TV가 없는 관계로... 다른 주연급 연기자, 특히 추수지 역의 배성우가 극을 무겁게 눌러줘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분위기를 잘 잡아주었습니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전투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죠. 주연급 등장인물들이 투구를 안쓰고 나오는 것이야, 많은 전쟁영화들이 피해가지 못한 오류니 그렇다치겠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주연급 배역들은 투구를 안쓸정도니까) 창기병이 돌격해 보병을 창으로 꿰뚫어 들어올리는 장면 등 영화적인 연출이 조금 지나친 지점이 중간중간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이런 연출이 영화적 재미를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죠. 실제로 초반 주필산 전투를 묘사할 때 개마무사를 상대하는 당나라의 밀집 방어진 등 감독이 역사와 전쟁을 잘알고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현실대로 고증대로 영화를 찍으면 재미없을 것이기 때문에, 서전인 주필산 전투에서 현실적인 전투를 보여주는 척 하다가 이후 판타지로 흘러버립니다. 그런 흐름을 보며 마치 감독의 의도가 귀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내가 몰라서 이렇게 찍은거 아냐. 그래도 이렇게 찍으니까 더 재밌지?
조금 지루해도 고증이 잘된 전쟁물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영화적 과장과 상상력이 더해진 쪽이 더 재밌는 것도 사실이라 감독의 의도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네요.
안시성을 보며 계속 오버랩된 영화는 킹덤 오브 헤븐이었습니다. 전투의 비장미나 스펙터클, 물량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실 킹덤 오브 헤븐이 한참 앞섭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안시성은 시티 오브 헤븐정도 될까요?
다만 이야기를 길게 늘였던 킹덤 오브 헤븐과 비교해 안시성은 (2시간 10분을 넘는 긴 영화지만) 간결미가 있습니다.(킹덤 오브 헤븐의 경우, 극장 개봉판은 144분의 긴 영화지만, 감독판은 그것보다 긴 194분이죠.)
안시성의 경우 주인공인 성주 양만춘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양만춘도 본명인지 모르는 정도) 양만춘의 전투 전 여정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안시성을 지킨 다른 장수들에 대한 묘사도 간결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안시성 전투가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전투에 포커스가 맞춰져 지루할 틈이 없죠.
킹덤 오브 헤븐은 주인공인 발리앙은 물론 그 주변 인물들, 안시성의 당태종에 해당하는 살라딘까지 묘사하면서 전투가 주인공이 아닌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전쟁에 휩쓸린 인물들이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당연히 이야기가 길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시간이 훌쩍 넘는 감독판을 보다보면, 4부작 드라마을 한번에 몰아본 느낌이죠.
킹덤 오브 헤븐이 역사에 남을 명작인 것은 맞지만(감독판 기준...) 극장에서 보기에는 안시성쪽이 더 재밌었습니다.
전쟁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안시성의 미덕은 캐릭터 설정에도 있습니다. 안시성의 캐릭터는 사실 매우매우 스테레오적이고 평면적입니다. 대신 캐릭터가 극을 이끌지 않고 전투에 그대로 녹아있을 뿐이라 관객들은 전투 그자체에만 집중하면 되죠.
이런 단순한 캐릭터를 사용하지만 캐릭터들은 영화가 끝나도 기억에 남는데 그건 캐릭터들이 사용하는 주무기가 특색있고 서로 겹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활을 쓰는 성주 조인성, 창의 달인 추수지, 기마대장 파소, 쇠뇌(석궁)을 사용하는 설현(아니 백하), 검도수장 풍과 쌍도끼의 활보의 포진, 자신의 특색을 무기로 설명하는 캐릭터들이라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다양한 캐릭터를 단시간에 그려야하는 감독의 고뇌가 묻어난 설정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설현... 을 제외한다면. 이건 설현의 잘못이 아니라 감독이 안넣어도 되는 장면을 억지로 넣은 것이 문제... 입니다. 아마도 투자를 받으려면 아이돌 한 명을 넣어야 했던 것 아닐까 합니다.
심도 깊게 찍어 주변을 다 날려버린 설현과 파소(아니 엄태구)의 클로즈업 샷은 감독이 찍기 싫어하는 티가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그밖에 아니 왜 저런 단역에 성동일을? 이라고 했는데 역시 성동일을 쓴 이유가 있었습니다. 배성우와 마찬가지로 극의 균형을 잘 잡아줍니다. 자칫 피식 해버릴 수 있는 씬을 무난히 넘겨준 캐스팅이었네요.
택시운전사에서 임팩트 있었던 엄태구를 다시 만난것도 반가웠습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 쭉쭉 뻗어주기를 바랍니다.
주필산 전투 장면도 괜찮았습니다. CG티가 좀 났지만, 밀집보병대에 충돌하는 개마무사의 묵직함이 화면을 뚫고나올 듯 해 영화의 서전 부터 기대하게 만들었네요.
나름 괜찮았던 영화 안시성. 흥행의 발걸음이 더뎌 조금 아쉽습니다. 추석 버프를 받고도 글을 쓰는 시점에 100만을 간신히 넘겼네요. 손익분기점은 600만 근처인데... 꼭 흥행에 성공해줬으면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스펙터클한 전쟁 영화들이 많이많이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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