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줄거리/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제가 감히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가 두려움이 앞섭니다. 1987은 이제 고작 30년이 지난, 과거라고하기에 너무도 가까운 우리의 지금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지금 이 지면에서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영화 그자체에 집중하겠습니다. 현실에 잠겨 이야기하기에, 1987년은 너무 뜨거웠던 한해였습니다.


1987 영화 김윤석


영화 1987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가져야 할 미덕을 두루 갖춘 정말 잘 만든 걸작입니다. 1987의 최고의 장점은, 입체적으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입니다.  


영화 1987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영화의 스토리전개에 깊게 몸담은 인물만 20명 가까이 됩니다. 등장인물이 이렇게 많아지면, 보통 영화 속 인물들은 평면적이 되기 쉽습니다. 극을 풀어나가기에 캐릭터들이 양면성을 갖는 것보다 동전의 앞면만 보여주는 편이 쉽죠. 관객들도 등장인물들의 성향이 언제나 똑같은 편을 선호하게 됩니다. 안그래도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나오는 사람들이 양면성을 가지고 나타나면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워지니까요.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스테레오적 인물들만 등장하면 극의 생명력이 죽어버립니다. 실제로 칼로 벤 것처럼 한쪽면만 갖은 사람은 드뭅니다. 이중, 삼중의 자아가 엃힌 인물들이 살아 숨셨던 실제 역사 이야기를 하며 그들의 한모습만 보여주면, 이야기 또한 반토막난 고등어처럼 머리 부분, 아니면 꼬리 부분만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보통 토막난 고등어는 죽습니다. 영화도 다르지 않죠.


영화의 시선은 주연들을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합니다. 최환 검사(하정우)가 대공수사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밀어붙인 이유가 단순히 정의감 때문으로 묘사되었다면, 캐릭터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1987 영화 하정우


박종철 열사의 사인이 사고사가 아니라고 의심한 최환 검사는 경찰의 무리한 수사를 덮어주다 검찰이 덤터기를 썼던 사건을 떠올리며 부검을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1987의 사건은 불타는 정의감이 아니라 극히 인간적인 이유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 사건의 진상을 점점 다가갈 수록 최환 검사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어찌보면 감정적인 동기로 시작한 박종철 열사의 부검은 끝내 정의를 실현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런 입체적이고 극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캐릭터들이 온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면서 영화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그 시대를 헤쳐나온 캐릭터들이 눈앞에 만져질 듯 서있다고 느낀 것은 이런 입체적인 캐릭터의 힘이었습니다.


이런 능수능란한 캐릭터 메이킹은 장준환 감독의 능력인가 봅니다. 장준환 감독은 데뷔작 [ 지구를 지켜라 ] 에서도, 올록볼록 엠보싱같이 입체적인 캐릭터들을 창조해냈습니다.(영화사에 지워질 수 없는 캐릭터를 남기고 계신 백윤식 선생님 전설은 지구를 지켜라 에서 시작했죠.)


이제 스토리를 따라가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이미 있었던 역사적 진실을 다룬 영화니 스포일러가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영화 1987을 통해 1987년을 처음 접하는 분이 계시다면, 스포일러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추가로 이미 기사를 통해 많이 나온 스포일러라 죽은 스포이지만, 영화의 반전 비슷한 것도 다루고 있으니, 한국 근현대사에 능하신 분들도 주를 부탁드립니다.



----- 스포 방지선 -----



영화 1987


영화는 남영동으로 달려가는 구급차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이 시각 고문을 당하던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영화 1987 김윤석


1987 남영동 대공수사처


고문받던 대학생의 사망소식을 접한 박처원 대공수사처장(김윤석 분)은 화장으로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려 합니다.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따르면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 경찰들을 뒷바라지한 박처원은 이후 구속될 때마다 집행유예를 받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박처원은 10년 전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하네요.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피해자 고 김근태 의원의 실화가 담긴 1980년대 배경 영화 '남영동1985' http://liag.tistory.com/179 에도 그 시대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 


1987 하정우


1987 경찰


1987 검사


하지만 최환 검사는 이 사건이 사고가 아닌 살인임을 직감하고 부검을 주장합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압박에도 법대로 부검을 강행하는 최환 검사.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법 집행이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약을 놓습니다. 언론에 박종철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것이죠. 


1987 영화 중앙일보 기자


최환 검사의 공작으로 세상으로 나온 슬픈 소식은 신문 지면에 올라 세상에 알려집니다. 


1987 영화 박희순


어렵게 진행된 부검. 하지만, 부검의 진행은 철저히 감춰집니다. 부검의 결과를 조작하기 위해서죠. 부검에 참가한 의사에 대한 회유가 진행됩니다. 하지만, 법의학자 황적준 박사는 이 사건이 사고가 아닌 고문치사라는 진실을 지켜냅니다. 

(이때의 심정을 황적준 박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남기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정희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깊은 사랑을 내게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애들은 영문도 모르고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1987년, 검사·기자·의사는 용감했다, [김형민의 역사 팩트체크] 영화 <1987> 박종철 사망사건 뒷 이야기, 뉴스톱)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억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던 중에 익히 잘 알려진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에 말도 안되다며 분노하는 기자들. 저 또한 이때 답답한 가슴에 고른 숨을 찾고자 애써야 했습니다. 


1987 박종철 모친


1987 박종철 부친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미와 아비의 모습이 이어지며, 시대의 흉터가 다시 갈라집니다. 피처럼 눈물과 한숨과 설움이 흘러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떠내려가게 합니다. 이때 정말 많은 울음이 극장에 흘렀습니다. 저도 끝내 참지 못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간이 지났고 장소가 바뀌어도 시대의 상처는 끝내 터질 준비를 했나봅니다.


1987 영화 최환 검사


좌천되는 최환 검사와 그를 쫓는 윤상삼 기자(이희준). 하정우 분의 최환 검사는 실존인물의 이름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후 변호사로 등장하는 최환 검사님이시지만, 실제 최환 검사님은 1990년대 말까지 검사 고위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을 성사 시키시는 등 대한민국을 밝히는데 앞장 서셨고, 2017년 광주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기도 하셨습니다.  


1987 영화 유해진


부검결과가 세상에 알려지며 대공수사처의 형사 2명이 수사를 받는 상황. 박희순이 분한 조한경 반장 등은 이른바 꼬리자르기를 당해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모두 뒤집어 쓸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범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1987 이부영 동아일보 해직 기자


1987 교도관 실존 인물, 실화


그리고 진짜 범인에 대한 정보는 교도소에 갇힌 동아일보 해직기자 이부영 기자(배우 김의성)님과 가공의 인물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이 밝혀냅니다. 교도관 한병용은 실존인물 한재동, 전병용 교도관님을 합친 캐릭터라고 하네요. 








1987 박처장


1987 조반장


꼬리자르기에 당한 자신의 부하 조반장(박희순) 들에게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박처원 처장. 박처원 처장은 영화에서 악독한 정권의 수하이지만, 단단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부하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노력하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1987 영화 김태리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학생들의 데모가 거세지자, 대학교앞은 검문하는 경찰들로 가득합니다.


1987 연희 실존 인물, 실화


미팅을 가다가 데모대에 휩쓸려 최루탄연기를 들이마시는 연희. 김태리분의 연희는 교도관 한병용의 조카이며 가공의 인물이지만 마찬가지로 모티브가 되는 실존인물이 있다고 합니다. 최루탄연기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가던 연희를 백골단이 습격할 때 누군가 나타나 연희를 구해줍니다. 그는 1987에 특별 출현한 잘생긴 대학생 오빠 강동원


1987 연희


1987 김태리 여대생


연희 또한 시대의 격류에 발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한병용 교도관님의 비밀 정보를 몰래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연희. 하지만 거대한 국가권력앞에 무력한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그럼에도 저항하려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그것은 너무도 가슴아픈 일이기에. 



1987 한병용 교도관


고문치사사건의 진범을 민주세력에 전달하려다 붙잡히는 한병용 교도관. 


1987 박처원


박처원 처장은 한병용 교도관님을 고문하며 수배 중인 민주화 세력의 중심인물 김정남님의 소재를 밝히라고 합니다. 

(김정남님은 이름없는 민주투사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그를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한번도 자신을 드러내 앞에 나서지 않았고, 또 내세운 일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운동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라고 평가하셨습니다.) 


1987 백골단


연희는 엄마와 잡혀간 삼촌을 찾아 남영동으로 가지만 백골단에 잡혀 서울 외곽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비내리는 가게 처마 밑에 서있던 연희를 찾아 잘생긴 학교 선배 강동원이 찾아옵니다. 


1987 강동원


이미지로 남기지 못했지만, 강동원분의 잘생긴 학교 선배는 연세대 만화 동아리 비디오 상영회에 5.18 민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실... 



1987 김정남


민주세력에 이부영 기자님과 한병용 교도관님이 알아낸 진범의 정보를 김정남님에게 알리는 연희. 그 사이 수배 중인 김정남님에게 대공수사처의 마수가 뻗칩니다.


1987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하지만 이미 고문치사건의 진범은 정의구현사제단함세웅 신부님께서 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기사를 내기 위해 뛰어나가는 기자들.


1987 대공수사처장


진실은 결국 세상에 상처뿐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세상은 지금 자신들이 일어서야 할 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박처원 처장은 꼬리자르기를 당하며 자신도 잘리기 위해 존재하는 한낮 꼬리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1987 이한열


그리고 이어지는 시민들의 항쟁. 그 열기속에서 또 한번 아까운 생명이 사그러듭니다. 잘생긴 학교선배의 피로 물든 모습을 본 연희. 연희가 마음에 품었던 그 사람은 최루탄에 유명을 달리한 이한열 열사였습니다. 

(영화 1987에서 강동원이 이한열 열사 역으로 특별 출연했고 박종철 열사 역은 배우 여진구가 맡았습니다.)


1987 518


연희는 사람들의 비명찬 함성이 이끄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고 키운이들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민주주의의 과실을 먹으며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1987 서울대 박종철 열사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끝내 전두환을 긴 독재에서 끌어내립니다. 김중배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1987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에서 한문장 인용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모든 살아있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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